정영주, 기억의 퇴적이 빚어낸 풍경
비좁은 골목길 사이로 난 경사진 계단과 옹벽, 낡고 삭은 담벼락, 희미하게 졸고 있는 가로등, 노후된 가옥, 그 속에서 살아가는 순정적인 사람들, 어디선가 본 것같은 이 풍경들은 정영주의 그림속에 담겨진 표정들이다.
정영주가 우리의 기억 저편에 남겨진 달동네를 그리게 된 것은 유년 시절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달동네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던 작가는 파리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어느 날 남산에 올라가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는 순간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게 되었고 이런 추억이 그림의 테마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선보이는 그림들은 일차적으로 그의 개인적인 추억이 서려있고, 또한 한국사회의 단면을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달동네란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가난을 반영하는 동시에 산업화 시대의 그늘을 보여준다. 즉 일자리를 찾아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렇게 형성된 것이 달동네였다. 이 시기는 우리 사회가 허리를 동여매고 불철주야 일밖에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달동네의 보금자리는 자기생활의 여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지친 몸을 추스리는 안식처이자 내일의 꿈을 펴는 기지같은 것이었다.
정영주는 달동네를 어떤 미화나 과장없이 표현하고 있다. 슬레이트지붕에 시멘트벽돌이 그대로 노출된 것 하며, 녹슨 양철대문이라든지 비바람이라도 곧 들이닥치면 금세 날아가 버릴 것만같은 천막이 눈에 띈다. 그림에 자세히 설명은 안되어 있지만 한집 건너 하나씩 미장원과 양화점, 구멍가게, 복덕방, 국밥집, 솜틀집, 연탄집이 모여 있었던 곳이 우리네 동네 정경이기도 했다. 그림을 보고 있자면 영락없이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듯한 기분을 갖게 된다.
그의 작품은 거의 예외없이 밤풍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깊은 밤중이라기보다는 초저녁에 가깝다. 노을이 비추면 동네는 낮에는 볼 수 없었던 붉은 빛을 수놓으며 하루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밤이 깊어질수록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동네는 곧 안온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특히 하얀 눈으로 뒤덮인 동네 야경은 신세계로 변해버린, 색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흥미롭게도 그의 그림에선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 ‘고요함’이 화면을 뒤덮고 있을 뿐이다. ‘고요함’은 그의 작품에 흐르는 주조음같은 것이다.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는 도시인들에게 ‘고요함’은 얼마나 생소한 개념인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저 앞만 보고 채찍질을 해대다가 망가질 대로 망가져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편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암묵적인 윽박지름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는 것만 같다.”(울리히 슈나벨) 차분히 앉아 의미를 반추하는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린 고통은 얼마나 큰지.. 그런데 정영주는 속절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쳇바퀴를 잠시 멈추고 과연 일상에서 얼마나 휴식과 행복을 누리는지, 삶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묻는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할 때, 다시 말해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있고 기댈 사람이 있으며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얻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고요함의 정중앙에는 가족이 있는 셈이다. 그의 고요함은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오프라인 상태, 즉 번아웃 신드롬의 일상과 비교하면 확실히 진가가 입증된다.
작가는 이따금씩 자문을 하곤 한다. 나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이것은 정영주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들이 고민하는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그 답은 각자 다 다르겠지만 어떤 작가이든지 자기가 제작한 작품이 감상자에게 감동을 주길 원하는 것은 같을 것이다. 그래서 단 한 작품이라도 사람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에 되는 것이다. ‘시가 역사보다 진실하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건을 평가와 판단을 보태 기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예술작품이 ‘삶의 진실된 측면’을 드러내어 감상자와 교감을 나누는 데에 있지 않을까.
“한지가 빛을 흡수하듯이 나를 흡수하듯 받아들이는 따듯한 마을의 모습을 통하여 언제든 지치거나 힘들 때 돌아가면 받아주는 마음속 고향같은 따듯함과 고요한 안정감을 느끼게 하고, 인간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를 한번쯤 생각하게 하고자 한다.”(작가노트)
작가는 작품을 통해 우리 삶에 있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반추해보고자 한다. 가난을 상징하는 판잣집이 마냥 행복한 기억일 수는 없다. 고되고 힘든 기억이 더 많을 터이지만 작가는 그런 기억들을 뒤로 하고 그때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환기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라도 가족들을 만날 것같은 즐거운 장면들을 꺼집어내고 싶은 것이다. 현실의 굴레가 아무리 무겁게 내리눌러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집에는 웃음이 넘친다.
그의 작품이 풍기는 ‘남루함의 시정(詩情)’은 한지를 구기고 펴서 만드는 작품제작수법과 연관이 있다. 이런 한지 콜라쥬 수법은 상채기 난 종이, 즉 우굴쭈굴 구겨진 흔적을 갖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굴곡진 삶을 환기시키며 전체적으로 퇴락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면서도 항상 따듯하고 온화한 성정을 잃지 않는다. 쉽게 토라지거나 삐지지도 않는다. 작가의 말처럼 언제나 나를 받아주는 마음속 고향같은 넉넉함을 지녔다. 한지 콜라쥬는 감상자들을 기억의 갈피속으로 안내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반전이 일어난다. 화면을 보면 적막한 가운데서도 집집마다 노랑 불빛이 흘러나옴을 알 수 있다. 밀집된 집 사이의 희미한 불빛이라고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 빛은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 작은 불빛은 조용한 동네를 밝힐 뿐만 아니라 어떤 난관과 시련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연함과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주위는 어둠속에 휩싸여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 희망이 그가 묘출하는 달동네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도시 - 사라지는 풍경>은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앞만 보며 달리다 잊고 지냈던 우리의 소중한 것들을 그는 섬세하게 짚어내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현재는 고달프고 힘들지만 성실히 살아가는 이웃들을 떠올리며 달동네를 그린다. 유년시절 기억의 퇴적에서 비롯된 달동네가 한낱 낭만으로 머물지 않고 울림있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같은 생각이 화면에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밤기운은 을씨년스러운 시대풍경을, 따스하고 은은한 빛은 가정의 행복을, 골목길은 그가 마냥 즐겁게 뛰놀았던 시절을, 거기에 한지의 촉각적 성질은 가물거리는 기억을 반추시키는 매개물이 되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작가는 사람들이 과거에 얽힌 이러저러한 ‘개인의 기억’을 ‘시대의 기억’으로 승화시키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최상의 예술을 위한 부싯돌은 바로 진실함이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뛰어나고 묘사의 박진성이 있다고 해도 진실성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글이 진실을 나르는 수레(文以載道)와 같듯이 진정한 예술가라면 진실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에게 훨훨 예술의 날개짓을 펼 수 있게 힘을 주는 것은 이러한 진실함이 아닐까.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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